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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야기/책리뷰

노는 만큼 성공한다 / 도서추천/ 독서

by 김철효 2020.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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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만큼 성공한다 / 도서추천/ 독서

 

 

출처 :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157858

 

 

이 책을 읽었을 떄가 아마도 2012년도 봄 쯤이었던 거 같다. 일 끝나고 잠깐 서점에 갔다가 요즘 읽을만한 책이 있는가 하면 돌다가 구매했던 책이다. 처음에는 책 제목을 보고 뻔한 그런 얘기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고민을 했으나 김정운 교수의 강의나 예능프로에서의 모습과 말들을 봤을 때 내용이 괜찮을거라 생각하고 짚어들었다. 이론적이 부분을 적절히 잘 넣어서 자신의 생각을 잘 풀어낸 책인거 같다. TV프로에서 자신의 전공인 심리학을 활용하여 강의하는 모습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었기에 김정운이라는 사람에게 더 끌렸던거 같다. 책 내용에 대해 별로이다라는 사람들도 많은데, 난 그래도 충분히 읽을만하다고 생각이든다. 충분히 공감가는 내용들도 많았고 도움이 되는 내용도 많았다. 책에서 내가 인상깊었던 부분들을 문서로 작성해 놓았다. 

 

 

출처 : https://kr.123rf.com

일에 빠져 있을 머리는 가장 무능해진다.

- 경제가 어려운데 무슨 노는 이야기냐고 혀를 차는 이들이 퍼뜨리는 불안감은 사스나 조류독감보다도 더 빠르게 전염되다. 그들은 21세기 국가경쟁력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 못 노는 386이 나라 망친다. 재미와 행복은 내 삶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일이어야만 한다는 무의식적 억압이 짓누른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적 태도로 인해 룸살롱이나 폭탄주와 같은 사이비 재미 앞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짓눌러온 평등과 민주의 도덕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린다. 이런 386세대의 재미와 행복의 이중적 태도는 어느덧 한국사회의 지배적 문화가 되어버렸다. 이들은 놀면 불안해지는 병에서 벗어나라.

 

노는 위에 나는 있다.

- 현재 한국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는 노사문제는 우리나라가 압축성장한 결과이다. (예 주40시간 근무 등등)

우리는 서구 사회가 200년에 걸쳐 이뤄낸 근대적 경제성장 과정을 50 만에 해치웠다.

19세기, 20세기 사회문화 변동의 핵심은 바로 이 노동시간의 단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이야기다. 40시간 근무제를 이뤄내기 위해 서구의 노동조합이 그토록 오랫동안 투쟁한 반면 우리의 주40시간 근무제는 노사정 근로 시간단축 특별위원회에서 20005월부터 20039월까지 불과 3년여의 논의를 통해 실시하게 되었다.

노동시간의 단축은 여가시간의 증가를 뜻한다. 서구 사회가 200년에 걸쳐 40시간 근무제를 이뤄냈다는 사실은 또한 200년에 걸친 여가 문화를 만들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200년에 걸쳐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쳐 생산적인 여가 문화가 형성되었기에 서구 사회가 오늘날과 같이 발전할 있었다는 이야기다. 서구 사회가 200 걸려 이룬 근대화를 우리가 50 만에 해치웠다면, 역으로 우리는 서구 사회의 200 년에 걸친 여가 문화의 형성을 50년에 이뤄냈어야 한다,. 하지만 여가 문화는 그렇게 번갯불에 구워먹듯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폭탄주와 고스톱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여가 문화는 바로 이러한 급속한 사회변화의 부작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변화하지 못하면 위기는 찾아오게 되어 있다. 경제발전을 따라가지 못한 금융시스템이 IMF 위기를 불렀듯이 노동시간 단축에 상응하는 생산적 여가 문화가 형성되지 못하면 한국사회의 총체적 위기는 다시 찾아오게 되어 있다. '놀면 불안해지는 ' 노동시간의 급격한 단축에 따른 생산적 여가 문화의 부재'라는 이중적 구조를 넘어서지 못하는 우리는

 

일본이 주40시간 근무제를 실시한 방식은 우리와는 사뭇다르다. 1985년부터 주 40시간 근무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해 지난 2001년 학교 교사들이 주 40시간 근무제 도입을 끝으로 전 사회적인 주40시간 근무제가 완성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에서는 주40시간 근무제가 라고 하지 않고 '주휴2일제'라고 부른다. 노동시간의 감소보다는 휴일의 증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노동시간의 감소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일본의 주40시간 근무제는 기업에서 주도한 측면이 강하다.

1970~1980년대 국제사회로부터 일밖에 모르는 '경제동물'로 비난을 받게되자 일본 기업들은 근로시간 단축을 자발적으로 추진한다. 우선 1973년에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주40시간 근무제를 자발적으로 도입하고 많은 기업들이 뒤따르게 된다. 물론 휴일 증가와 생산성 향상의 긍정적 상관관계에 대한 수많은 연구들을 기초로 기업들이 그러한 결정을 내렸음은 두말할 나위없다. 그러한 변화를 정부가 뒤따라 제도화함으로써 주40시간 근무제가 실시 되었다.

대부분의 서구 각국은 노동자가 주도해서 주40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었다. 반면 일본은 기업 주도로 40시간 근무제가 실시되었다. 우리의 경우는 정부주도로 이 제도가 시행되었다고 봐햐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40시간 근무제의 도입이 가져올 사회 문화적 변화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다. 대책없이 늘어난 여가시간은 재앙이다.

 

쉬는 날, 쉬지않고 푼이라도 벌려고 한다.(노동의 브라질화)

잘 쉬라고 휴일을 늘려주면 오히려 더 많이 일하려고 달려든다. 울리히 벡이라는 독일 사회학자는 '노동의 브라질화'라는 개념으로 이현상을 설명한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하에서의 노동관계의 탈규제, 노동 시장의 유연화, 노동시간의 감소로 인한 노동 시장의 불안정은 노동의 유목민화 현상을 초대한다는 것이다. 아주 쉽게 정리하자면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려고 이리저리 저전한다는 뜻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주말, 야간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는 뜻이다.

'노동의 브라질화'는 남미나 유럽만의 얘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IMF위기 이후 '노동의 브라질화'가 현실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조기퇴직, 청년실업 등으로 인한 실업률의 증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 나홀로 창업 등의 증가로 인해 닥치는 대로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투잡스족, 쓰리잡스족이 늘어나고 있다. 쉬는 시간에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비정규직 주말 노동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미국의 경우 2 세계대전 이후 40시간 근무제가 정착되었으나 주말에 사람들이 많은 노동을 함으로써 가족의 위기가 증가하고 삶의 질이 저하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저소득층의 경우, 노동시간이 줄면 소득고 감소한다. 줄어든 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주말과 밤에 다른 일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저소득층만 그런 것이다.

중산층의 경우에도 여가시간 증가에 의한 소비패턴의 변화에 따라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진다. 화려한 소비를 위해 기꺼이 투잡스족이 되려 한다.

통계청의 생활시간 조사 자료를 보면 정규 노동시간이 감소할수록 야간 노동시간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1980 이후로 야간 노동시간이 4 가까이 증가했다고 한다. 노동시간의 감소는 야간 노동 시간의 증가는 물론 주말 노동시간의 증가로 이어진다. 결국 여가를 즐기며 삶의 질을 놓이라는 40시간 근무제가 오히려 여가시간마저 일을 찾아 헤매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늘어난다.

투잡스, 쓰리잡스 부모들이 주말과 밤에 집을 비우게 되면 청소년문제가 다양하게 늘어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부모들을 대신 사회복지기관과 여가시설에 대한 투자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청소년들 스스로의 힘만으로 헤쳐나가야 다양한 시행착오가 초래할 사회비용에 대해서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궁극적으로 교사들의 40시간 근무제는 학교의 5 수업제로 이어진다. 학교와 가정에서 놓여난 저소득층 나자녀들이 당면하게 문제들에 관한 별도의 대책을 무엇보다 시급히 세워야 한다.

반면 중산층 자녀들을 대상하는 하는 사교육 시장이 급속이 팽창할것이다. 40시간 근무제에 불안을 느낀 부모들은 주말 동안 학원과 과외를 통해 자녀들을 교육시키려고 것이다. 현재 40기간 근무제를 열심히 준비하는 곳은 사교육 시장이라는 이야기도 거짓이 아니다.

 

노동소외보다 여가소외 현상이 더 문제다.

20세의 산업 사회에서는 노동소외 현상이 문제였다면 앞으로는 여가소외 현상이 문제가 된다. 주말은 물론 아간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저소득층이 박탈감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된다.

계층 간의 갈등이 더욱 심각해질 것은 불을 보든 뻔하다.

앞으로 일부 계층을 중심으로 해외여행 등의 과소비가 늘어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말 야간 가릴 것 없이 일하는 투잡스, 쓰리잡스 족들이 늘어나는 사회약극화 현상과 그로 인한 사회문화적 갈등은 치유할 없는 수준으로 발전하게 것이다결국 진정한 삶의 질 제고와는 거리가 먼 자극적인 여가의 상업화가 진행된다.

 

사실 문화관광부를 중심으로 주40시간 근무제 대책회의가 지난 2004년에 지속적으로 있었다. 나도 계속 참여 했다. 자세한 대책을 세우고 2005 예산을 신청하니 기획예산처의 관리가 웃더라는 것이다.

"아니, 노는 날이 늘어났으면 좋은 거지 대책은 무슨 대책?"

결국 한 푼도 못 받았다.

대통령이 다시 노동자의 여가생활에 대한 적극 지원을 지시했다. 그러나 예산 또한 국회에서 삭제되었다. 20041231, 그동안 서로 싸우느라 정신없던 국회희원들이 예산심의 시한 마지막 분을 앞두고 나름대로 심의한다며 '여가'라는 글자가 들어간 예산을 잘라버린 것이다. 경제가 어려운데 무슨 여가냐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준이 정도다. 낙석 운을 하려고, 국회의원 이름을 알아내려고 백방으로 애썼으나 알려준다. 국가비밀이란다.

국가는 국민을 행복하게 해줄 책임이 있다.

여가정책, 여가문화는 국가의 경쟁력이다.

 

 

출처 : https://es-es.facebook.com/pg/natae.fanpage/posts/

 

일의 반대말은 여가가 아니라 나태이다.

사람들이 헷갈리는 이유는 지금까지 일은 남이 시켜서 하는 행위로만 여겨왔기 때문이다. 일의 주인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더럽고 아니꼽지만 참고 견뎌야만 하는 것이 일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일의 반대말은 여가나 놀이가 아니라 나태가 된다. 자신이 하는 일의 주인은 놀듯이 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의 주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일의 반대말은 여가다. 일은 재미없고 여가나 놀이만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놀기 위해 일한다. 그리고 외친다.

'주말을 위해 일하라'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금요일입니다.'

 

인센티브 위에 자존심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일에 한해서만 책임진다. 내가 선택했다는 느낌이 있을 일의 주인이 된다는 이야기다. 통제의 주인은 경영자가 아니라 스스로라고 생각할 회사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하게 된다. 통제나 선택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고 여겨질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한다.

사람들이 자존심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우선 집단의 사람들에게 정말 재미없는 영화를 보여준다. 영화를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화가 무척 재미있다고 거짓말을 하도록 시킨다. 이때 A집단에게는 거짓말의 대가로 100달러를 주고 B집단에게는 1달러를 준다.

그 이후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본인들은 솔직히 영화가 재미있었냐고? 그랬더니 집단 중에 집단의 사람들은 영화가 '정말 재미있었다!' 대답했다. 과연 어느 집단이 사람들이 아무도 재미없다고 하는 영화를 재미있다고 느꼈겠는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100달려 받은 사람들이 영화를 재미있게 느꼈을 같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정반대다. 1달러를 받은 사람들이 영화를 정말 재미있게 봤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1달러 받은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100달러 받은 사람들은 그 단순한 거짓말에 비해 과분한 보상이라 느끼며 기꺼이 그 영화가 재미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1달러를 받은 사람들은 불과 1달러에 거짓말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을 피하는 방법은 유일하다. 차라리 그 영화를 정말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영화가 재미있다고 느껴버리면 단돈1달러에 거짓말을 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피할 수 있게 된다.

 

보상이 사라지는 순간 일하기를 멈춘다.

인센티브와 같은 보상을 통해 행동을 유도하는 것도 그리 오래갈 수 없다. 100달러를 받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그때뿐이다. 유치원에서 심리학자들이 행한 보상의 결과에 대한 실험 이야기다.

아이들이 칠판에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있었다. 유치원의 아이들을 집단으로 나눴다. 우선 A집단의 어린이들에게는 예쁜 그림을 그리면 상품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림을 그린 후에는 약속대로 상품을 줬다. 나머지 집단의 어린이들에게는 별다른 약속 없이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린 B집단의 어린이들에게도 A집단의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상품을 줬다. C집단이 어린이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그 유치원을 방문하여 아이들이 칠판에 그림을 그리는 놀이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결과 집단에 따라 그림그리기 놀이를 하는 시간이 크게 달라짐을 확인할 있었다. A집단 어린이들의 그림 그리기 놀이 시간은 절반 수준으로 줄어 있었다. 반면B집단의 어린이들과 C집단의 어린이들은 지난번에 비해 오랜 시간 그림 그리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특히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았던 C집단의 어린이들이 가장 오래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보상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보상이 사라지는 순간, 이상 일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오직 월급과 인센티브만으로 직원들을 움직일 있다고 생각하는 경영자가 있다면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보상에 대한 기대는 갈수록 커질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가 지나면 웬만한 보상에는 전혀 감동하지 않는다. 이런 직원들에게 괘씸하다고 분통을 터트리는 경영자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직원들은 자존심을 버린 대신에 보상을 선택했기에 보상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는 순간, 바로 자신의 자존심을 되찾으려 시도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되찾은 자존심을 이전에 비해 강하게 지키려고 애쓴다.

 

보상으로 휴혹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20세기적 기업 경영의 핵심은 다양한 금전적 인센티브로 사람들의 노동 의욕을 극대화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직원들은 더 높은 보상을 위해 다른 직장으로 떠난다. 결국 뛰어난 인재들을 붙잡으려면 갈수록 높은 보상을 약속해야만 한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그러나 보상을 약속하면서 잡을 수 있는 사람들조차도 갈수록 줄어든다. 돈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다.

우선 개인주의형 인간들이 늘어난다. 개인주의형 인간들은 금전적 인센티브로 움직일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조직에 대한 충성은 상상할 없다. 그들은 개인의 행복을 극대화하려는 사람이다. 재미가 있다면 언제든지 직장을 떠날 있다. 오늘날 IT관련 산업에서 일하는 젊은 엘리트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들에게 일이란 재미와 결부되어 있다. 자체의 재미와 일터에서의 재미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직장은 의미를 상실한다. 그들에게는 주말의 다른 삶도 매우 중요하다. 직장의 삶이 주말의 삶을 방해한다면 언제든지 직장을 포기할 있다.

또 다른 종류의 인간형도 나타난다. 그들에게는 가족주의형 인간이란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적당할 같다. 가족주의형 인간들에게 직장에서의 성공은 그리 의미가 없다. 그들의 궁극적 관심은 훌륭한 아빠, 찬한 남편이 되는 일이다. 보다 높은 지위를 보장해주고 돈을 kasgdl 준다고 약속해도 그리 관심이 없다. 오후 5시면 칼퇴근이다.

 

출처 : https://dreamlog.tistory.com/324

 

 

집안일을 회사로 가져오는 것은 왜 안되나?

문제는 앞으로 이러한 개인주의형 인간들과 가족주의형 인간들이 늘어나고 경영자들이 원하는 조직충성형 인간들은 갈수록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인센티브 제도만으로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려는 경영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개인주의형 인간, 가족주의형 인간이 있다는 사실조차 상상할 없다. 절망에 경영자들은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며 해병대 입소를 추진하거나 연수원을 군대식 훈련소로 바꿔본다. 경제가 어려운 요즈음이야 모두들 숨죽이고 가만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바뀐다.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갈수록 급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영자는 주말에 회사일로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답변을 요구하는 것이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21세기형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직원들은 반대로 물어본다.

당신은 주말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면서 내가 월요일 회사에서 영화표를 예매하거나 주식투자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가?

회사 일을 가득 안고 집에 가는 것을 흐뭇하게 생각하면서도 주중에 아이들을 회사에 데려와 노는 것을 상상도 못하는가?

 

일과 삶의 균형 프로그램 (Work-Life Bqlance Programn)

변화하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하지 못하는 기업 경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직원들의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과 조화를 배려하려는 새로운 인재 관리 전략이다. 우선 WLB프로그램은 개인의 일과 가족의 불균형으로 생기는 갖가지 문제를 유연근무제, 육아 휴가, 변동 휴가제 등을 통해 해결하려 시도한다. 또한 개인의 경력 관리와 회사의 업무가 일치하도록 배려하는 갖가지 제도를 실시한다. 개인의 관심과 회사의 업무가 제대로 일치하지 않으면 직원들이 떠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필요한 능력이 있는 인재일수록 미련 없이 떠난다.

 

일중독에 빠진 리더의 철학

-오버씽킹

인도의 수도승 두 명이 질척거리는 길을 걷고 있었다. 저편에서 아리따운 아가씨가 길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비단 신발이 더렵혀질까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도승이 그녀를 업고 진흙탕 길을 지나 내려주었다. 그리고 수도승은 이전처럼 말없이 계속 걸었다.

저녁이 되자 여자를 업고 길을 건넌 수도승에게 다른 수도승이 질책하듯 말했다.

어ᄄᅠᇂ게 자네는 여자를 업어줄 생각을 있었지? 수도승은 여자를 멀리해야 하는 것을 몰랐나?’

그러자 여자를 업저줬던 그 수도승은 대답했다.

나는 길을 건너자마자 여자를 내려줬다네. 그런데 자네는 어째서 아직도 그 여자를 업고 있는가?’

여자는 걱정거리를 상징한다. 여자를 업어준 수도승은 진흙탕을 건너면서 잠시 걱정했을 뿐이지만 다른 수도승은 번도 걱정과 시름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으면서도 자신이 걱정하고 있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비유하고 있다. 우리도 어리석은 수도승처럼 항상 걱정을 등에 업고 산다.

 

 

일중독자는 일하는 시간이 짧다.

직장에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일중독자일수록 수낳은 걱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일중독자와 정말 잘하는 사람은 다르다. 일중독자는 자신이 일주일에 70시간을 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잘하는 사람은 일주일에 40시간밖에 일하지 않는다.

일중독자가 일을 훨씬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일중독자가 일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일주일에 70시간을 일한다고 생각하는 일중독자가 실제 일하는 시간은 30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 40시간 동안은 일하기는커녕 일에 대해 걱정하면서 보낼 뿐이라고 한다.

일중독자는 주말에 어쩌다 곤한 낮잠을 자고 나면 기분이 왠지 찝찝하다. 내가 이렇게 귀중한 주말 시간을 허비해도 되는가 하는 걱정 때문이다. 일요일 저녁이 되면 왠지 불안해진다. 새로 시작되는 한주가 기다려지기보다는 불안해진다. 주말에 너무 놀았다는 생각떄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월요병은 단순히 심리적 질병이 아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심장볍으로 인한 사망률이 월요일에 제일 높다고 한다.

모처럼의 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불안한 마음이 떠나질 않는다.

내가 이렇게 노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겠지? 이러다 영영 뒤떨어지는 것 아냐?’

자신뿐만 아니라 사원들의 운명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CEO 간부들의 불안과 근심은 가끔 도를 지나쳐 불면증에 이르기까지 한다.

옆은 잠결에 문득 생각난 일 걱정 때문에 잠을 깬 후, 다시 잠들어보려고 애써 보지만 허사다. 결국에는 안방에서 나와 냉수 들이켜고 이른 새벽 거실 소파에서 어제 신문이나 뒤적거리는 안타까운 중년이 의회로 많다.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과연 이렇게 걱정할 것이 많은 것일까?

아니다. 40퍼센트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고 30퍼센트는 이미 일어난일이고 22퍼센트는 아주사소한 일이고 4퍼센트는 우리가 전혀 손쓸 없는 일들에 관한 걱정이다.

이제 남은 4퍼센트만이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일이다.

 

행복한 순간조차 걱정거릴 찾는 사람들..

정말 중요한 일은 어떤 일일까?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오버씽킹으로부터 벗어날 있을까?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내가 행복해하고 재미있어 하는 일을 발견하는 것이다. 삶의 목적이 되는 행복과 재미를 추구하면 뭔가 죄의식을 느낀다. 잘못된 생각이다. 모두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시절이 난긴 피해의식이다.

 

근면 성실한 사람이 불쌍해지는 사회

19, 20세기를 산업사회라고 한다면 21세기는 지식기반 사회, 정보화 사회 혹은 이 둘을 합쳐서 지식정보화 사회라고 특정지을 수 있다.

산업사회는 농경 중심의 전통사회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공업이 주축이 되는 사회로 옮겨간 사회이다. 산업사회에서는 육체적 노동이 이윤을 창출하는 원천이다. 따라서 근면과 성실은 사회유지를 위한 필수 덕목이 밖에 없었다.

한국 사회가 지난 50년간 압축 성장을 있었던 바로 근면 성실의 사회적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있다. 이기간 동안 한국사회에서의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도 이와 무관할 없다. 굳이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사회 전반에 걸쳐 가난을 극복하려는 맺힌 노력들이 근면 성실의 가치를 극대화하여 한국사회의 자본축적과 확대재생산을 간으케 했다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의 지식정보화 사회는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근면 성실의 가치로만은 사회가 유지될 없다. 창의적 아이디어를 간으케 하는 '재미'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적 가치가 된다.

 

출처 : http://www.happycre.com/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창의성이라고?

도대체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창의성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하면 창의적이 있을까를 설명해주는 이는 별로 없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창의성은 이렇게 정의도어 있다. '새로운 생각이나 의견을 생각해내는 특성' 이렇게 황당한 정의가 어디에 있을까?

영어사전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새롭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물건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란 것이다. 새로운 생각을 생각해내는 것이 창의성이라니, 이렇게 동어반복으로 창의성을 정의해서는 아무도 창의적이 없다.

'도대체 뭐가 새로운 것입니까?

자칭 창의정 전문가들은 대답할 것이다.

'새로운 것이란 생전 들어보지 못하고 본적도 없는 것 혹은 상상ㄹ할 수도 없던 것이지요.'

그러면 또 물어보게 된다.

'도대체 누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 상상할 수도 ㅇ벗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요? 뭘 만들어내려면 상상은 가능해야 한 것 아닌가요?'

도대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지요?'

 

새로운 것은 없다.

창의성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어 있다. '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평생 지혜를 추구했던 솔로몬의 이런 최후의 탄식을 비리지 않더라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그런 종류의 새로운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새롭다고 느끼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 예전에 있던 것들이 다른 맥락에 놓이면 우리는 새롭게 느낀다.

정확히 말해 창의성이란 아주 익숙한 것을 다른 맥락에 놓아 새롭게 느끼게 하는 능력을 뜻한다. 앞서 힘들게 정의했던 정보와 지식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자면 창의성이란 다음의 두가지로 정의된다.

 

A:정보와 정보들의 관계를 이전과는 다르게 정의하는 능력

B;정보의 맥락을 바꾸는 능력

 

한번 물어보자.'도끼'망치''나무''', 가지 중에서 불필요한 가지를 빼내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은 '나무' 빼낼 것이다. ? '도끼''망치''톱은 연장이고 '나무' 재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론의 과정은 '연장''자료'라는 추상적 지식을 우리가 습득하고 있고 지식의 맥락에서 '도끼' '나무'등의 정보들이 의미를 갖고 있기에 가능하다.

러시아의 벌목공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더니 전혀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가지 중에서 불필요한 것은 '망치'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나무' 연장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기에 '나무' 절대 없는 것이다. 물론 '망치' 필요하지만 다른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하기에 '망치' 있다는 것이다. 전혀 새로운 지식이다.

러시아 벌목공들이 인지하는 '도끼''망치''나무''' 이들 정보간의 관계는 우리가 구성하는 정보 간의 관계와 전혀 다른 것이다. 전혀 다른 지식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을 러시아 벌목공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헛소리거나 반대로 매우 창의적인것이 된다. 이렇게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다양하고도 유연하게 연결하는 것이 바로 창의성이다.

 

좋은게 뭔지 겪어 봐야 안다.

한국인에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아름답고 행복하며 쾌적한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적개심에 가득 차서 건들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운전대에 바짝 붙어 하는 한국인들의 표정에는 아름답고 행복하고 쾌적한 것들에 대한 기대를 찾아 수 없다. 그러니 누가 자기 앞에서 차선을 바꾸겠다고 깜박이를 켜면 절대 끼어들게 하는 것이다. 행복한 것은 몰라도 기분 나쁘고 우울한 것은 너무 알기 때문이다.

내 앞에 누가 앞서가는 것은 도로 위가 되었든 회사가 되었든 우울하고 기분 나쁜 일이다. 오죽하면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들은 차선을 바꾸겠다는 신호를 빨리 달려오라는 신호로 아는 같아요'라고 푸념을 할까.

 

어른들은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들고 아이들은 익수한 것을 낯설게 만든다.

쉰 살 먹은 사람의 창의력은 다섯 살 어린이의 창의력의 4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어린이가 창의적인 이유는 '낯설게 하기' 통해 끊임ㅇ벗이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아무 의미 없는 조각으로도 하루종일 있다.

아이들의 놀이에서는 정보의 재조합을 통한 '낯설게하기'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어른들은 빗자루를 가지고 청소할 생각 이외에는 어떠한 상상도 하지 못하지만 아이들은 빗자루를 말처럼 타고, 총싸움 칼싸움을 하다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간다. 빗자루라는 정보의 맥락이 청소 도구의 맥락에서 하늘 날아가는 맥락으로 바뀌면서 빗자루의 '낯설게 하기' 일어난다.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재미'이다.

레고 블록과 같은 장난감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극대화한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에서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과 뒤바뀌거나 생략되어 버린다. 빗자루는 청소의 수단이 아니다. 빗자루 자체가 즐거움의 대상이거나 전혀 다른 즐거움의 수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부모들은 이렇게 놀면서 최고의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는 아딜에게서 빗자룰 빼앗고 창의성 학원에 가는 버스에 태운다. 그런 아이들은 자라서 부모들과 똑같이 우울한 얼굴로 운전을 하며 앞에서 차선을 바꾸려고 깜박이를 켜는 이들을 절대 용납 못하는,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항상 그 부모에 그 자식인 법이다.

 

출처 : http://www.playfulhealingcenter.org/ko/playtherapy-ko.html

 

놀이는 최고의 의사소통 훈련이다.

엄마와 아기의 정서조율을 배워라.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와 내가 이해하는 단어의 의마는 서로 다르다.

상호주관성이란 서로 공유되고 있음을 뜻한다. 객관적인 관점에 의해 의미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미 체계가 공유되는 것이다.

정서공유가 서로 이뤄져야 된다.

 

나를 기쁘게 만드는 사람과 괴롭게 만드는 사람의 차이

사람들에게 유난히 사랑받는 사람들은 정서공유를 잘한다. 남의 기쁨, 슬픔, 우울함, 흥분과 같은 정서를 아주 공유해준다. 우리는 상대방의 표정, 눈짓, 목소리를 통해 사람이 정서를 공유하는 아닌지를 동물적인 감각으로느낀다. 우리는 아주 어릴 엄마와 놀면서 정서공유의 방식을 몸으로 익혔기 때문이다.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정서를 공유하는 리추얼의 기초는 눈을 맞추는 일이다. 나는 독일에 유학 가서 처음으로 파란 눈을 봤다. 그런데 파란 눈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나는 독일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지하철에서 처음 본 파란 호수 같은 눈을 보고 정말 정신 못 차리고 있었다. 넉ㅎ 넣고 보고 있는데 그 아가씨가 어찌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아가씨가 보고 씽긋 웃는 것이었다. 순간 정말 푸른 호수로 다이빙하는 느낌이었다. 비록 말이 통해 이상의 작업은 불가능했지만 나는 황홀한 느낌에 온종일 다녔다. " 얼굴이 독일서도 통하는구나!"

물론 착각이었다. 그네들은 할머니도 나와 눈을 마주치면 웃었다. 아저씨도 웃었다. 물론 친절한 사람들에 한해서. 눈을 마주치면 웃는 것이 그네들에게 문화적으로 굳어진 정서공유의 가장 기본적인 리추얼이란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뒤였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당황하는 것은 바로 이 정서공유의 리추얼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눈이 마주치면 피한다. 그런데도 누가 계속 보고 있으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노려본다. 그런데도 상대편이 계속 바라보면 적개심에 가득 눈싸움이 시작된다. 그러다가 성질 급한 사람이 먼저 내뱉는다.

"왜 째려봐!"

서로 바라보는 눈길이 무서운 사회는 살 만한 사회가 아니다. 우리는 운전하다 창문으로 눈길이 마주칠 적개심이 가득 표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마치 동네 어귀의 개가 낯선 사람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이다. 우리도 이런 우리가 너무 싫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에게 여전히 그러고 산다. 사는 재미가 없는 까닭이다. 사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미있어 하는 일이 분명해야 한다.

아이들은 항상 행복하다. 아이들은 항상 재미있느 일만 찾기 때문이다.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금방 잊어버린다. 우리 둘째 녀석은 자기형이 여섯 살이나 위인데도 자주 싸운다. 물론 형에게 얻어맞고 집안이 시끄럽게 울지만, 엄마는 녀석 모두 눈물이 빠지도록 혼내고 벌세운다. 그런데 잠시 가만히 들여다보면 녀석이 히히거리며 장난치고 있다. 노느라고 자신들이 혼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자라던 우리의 아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재미를 박탈당한다. 재미가 없다는 사실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부모가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공부하라는 잔소리와 더불어 갖가지 학원으로 아이들을 보내면서부터 아이들은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부모들은 스스로도 불행한 사람들이다. 자신들도 자라면서 재미를 박탈당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들이 '노는 ' 본다. 아이들로부터재미를 박탈하는 것이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여가 정보학과 교수라니까 사람들은 내게 물어본다.

" 어디가면 재미있어요?|

그럼 나는 되묻는다.

"무엇을 재미있어 하세요?"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하면 재미있어 하는지 알아야 어딜 가면 재미있는 알려줄 것 아닌가?

 

교육 문제의 근원은 '사는 재미없는 엄마들'

아이들을 괴롭히기 전에 부모들부터 자신이 무슨 일을 좋아하는지 찾아내야 한다. 나는 우리나라 교육문제의 본질은 사는게 재미없는 엄마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는게 재미없는 자신의 문제를 아이를 괴롭히는 방식으로 풀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이 자식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가끔 아내가 아이들 학교의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고 오면 얼굴이 노랗게 변한다. 왜냐고 물으면 우리가 키우는 것이 잘못되어 있단다. 다른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렇게 해서는 정말 같단다. 내용을 들어보니 나도 겁난다. 이런 세상에 나는 심리학을 전공한 교수다. 그런 나도 겁이 정도니 다른 부모들은 어느 정도일까.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인디언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을이 되자 인디언 추장에게 부족들이 몰려와 겨울은 얼마나 춥겠느냐고 물었다. 추장은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자기 텐트에 들어와 기상대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다. 기상대에서는 겨울이니 물론 춥겠지만 얼마나 추울지 아직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추장은 발ㄲ으로 나와 말했다. 추울 듯하니 겨울을 준비해라. 부족들은 돌아가 땔감을 모으기 시작했다. 얼마만큼의 땔깜이 모이자 부족들이 추장에게 달려가 다시 물었다. 겨울에는 얼마나 춥겠느냐? 얼마만큼의 땔감을 모아야 하느냐? 질문이 이어지자. 추장이 기다리라고 하고는 다시 기상대에 전화를 걸었다. 올겨울에는 얼마나 춥겠느냐고 묻자. 기상대의 대답이지난번과는 달라졌다. 추워도 엄청나게 춥겠다는 것이다. 추장이 왜냐고 묻자. 기상대 . 요즘 인근의 인디안 부족들이 땔감을 모으느라고 난리인 것을 보니 겨울은 사상 초유의 한파가 밀려올 것이라나.........

우리나라 교육문제가 꼭 이 모양이다. 엄마들끼리 모여 교육위기를 걱정하고 이야기를 들은 교육 전문가들은 교육 위기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러다 얼마들이 이야기를 전문가의 의견이라고 용어만 바꿔서 내놓고 발표를 엄마들은 다시 교육의 위기를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그리고 엄마들은 살이 되면 바다를 보겠다고 집을 뛰쳐나간다. 자식들을 위해 모든 희생했는데 인생은 어디 갔느냐고 바다를 보며 통곡한다.

 

출처 : https://www.momtalk.kr/info/view/2663/%EC%95%84%EC%9D%B4%EC%99%80-%EC%A0%9C%EB%8C%80%EB%A1%9C-%EB%86%80%EC%95%84%EC%A3%BC%EB%8A%94-%EB%B0%A9%EB%B2%95

 

부모가 재미있어야 아이들도 행복해진다.

부모들부터 재미있게 살아햐 한다. 부모가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아야 아이들도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운다. 자녀를 결혼 시킬때 가장 먼저 살펴보는 것이 무엇인가? 사윗감이나 며느릿감의 학벌이나 직업이 아니다. 물론 좋은 학교 나와서 많이 벌면 좋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벌고 학벌이 좋아도 매일 저녁 우리 딸을 팬다면 누가 녀석에게 시집을 보낼 것인가?

우리가 가장 먼저 보는 기준은 그 녀석이 얼마나 행복한 집안에서 자랐는가이다. 행복한 집에서 자란 놈이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소위 불행을 딛고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돈이나 명예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대부분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렵고 불행한 집안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일수록 특별히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은 버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행복하게 살려면 재미있어 하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 재미있어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멍해진다. 그리고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답한다. 그러나 내용이 모두들 비슷하다. 여행 가는것, 영화 보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말로 좋아하는 거은 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어행을 가더라도 어떤 방식의 어행인가가 분명해야 한다. 영화를 보더라도 어떤 종류의 영화가 좋은가가 분명해야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기에 부모들은 사는 재미가 없고 사는 재미가 없기에 행복하지 않다. 몰두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소한 재미의 힘!

하게 즐기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건강한 사회다. 다양하게 즐길 것이 많기 때문이다. 즐길 것이 많다는 이야기는 문화적 다양성이 담보된다는 이야기다. 획일적인 사회는 이상 경쟁력이 없다. 21세기 국가 경쟁력은 얼마나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확보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20세기까지 세계의 문화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지배한 것은 디즈니랜드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상업 문화다.

200년이 좀 넘는 역사에 불과한 미국이 전 세계의 문화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각군의 인종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 국가를 수립하면서 근대적 국가의 틀을 이뤄나갔던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미국은 민족국가 수립 자체가 불가능했다. 결국 다양ㅇ한 인종의 이민자들이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면서 하나의 국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한 결과가 디즈니랜드는 이제 끝이 난 느낌이다.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들이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베끼기 시작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할리우드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문화시장이다.

한때 우리가 일본의 젊은이들을 한심하다고 비웃는 일이 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전철에서 보는 대부분의 책이 만화책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직장에서도 만화책에 몰두하는 사무직 노동자들도 아주 자주 목격되었다. 우리는 일본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러나 년후 한심해 보였던 일본의 젊은이들이 디즈니를 능가하는 문화 상품을 만들어냈다.

포켓몬과 디지몬이 바로 그것이다. 할리우드의 만화 영화는 이미 존재하는 동화나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익숙한 스토리에 새로운 디지털 기술의 만화를 덧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포켓몬과 디지몬은 스토리 자체가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것들이다. 순전히 상상력의 산물이다. 몬스터 캐릭터가 지겨워질 만하면 새로운 캐릭터가 나타난다. 캐릭터들은 변신을 거듭하여 진화까지 한다.

수십 년 동안 같은 모양 같은 이야기인 디즈니의 미키마우스가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러니 세계의 어린이가 열광할 수밖에 .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아이가 있는 집에 포켓몬과 디지몬 장남감이 없는 집은 없다. 일본 만화광들은 특유의 상상력으로 게임의 법칙도 독정하고 있다. 세계 게임시장의 대부분은 일본 만화광들의 차지다.

일본의 엄청난 문화산업을 가능케 한 것은 '오타쿠'라고 불리는 인본의 마니아들이다. 그들은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가지고 재미있다고 모로려다닌다. 그것도 만화의 주인공 흉내를 내면서 몰려다닌다. 오토바이로 산길의 진흙탕 길을 다니며 재미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욘사마의 고향이라고 중년의 아줌마들이 춘천까지 날아와 몰려다닌다.

일본이 무서운 것은 바로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이 담보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독도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우익은 하나도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일본인은 욘사마를 쫓아 다니는 일본 아줌마들이다. 생각해보자. 우리의 아내들이 일본의 영화배우에 미쳐 일본으로 날아가 며칠씩 흥분해서 몰려다니면 이를 참고 바라볼 있느 ㄴ한국 남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일본에서는 한심한 재미마저 인정된다. 남편들도 인정하고 일본 사회도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인정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우리의 문화 상품이 팔린다고 철없이 좋아할 일이 전혀 아니다. 솔직히 나느 두렵다. 욘사마에 미쳐 돌아가는 일본의 아줌마들의 한류 열풍이 인정되는 일본의 문화적 잠재력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를 다시 점령할지.

 

성공했는데 왜 외로워 질까?

참새가 새입니까?

모두 쉽게 대답한다.

반면에 오리가 새입니까? 하고 물으면 박자 주춤하게 된다.

타조가 새입니까? 하고 물으면 좀 더 시간이 걸린다.

참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새의 일반적인 특징,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나는 모습이 바로 연상된다. 그러나 하늘을 날지 못하는 오리나 타조를 새라고 대답하기에는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퇴화된 날개에 관한 논리적 추론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전형성효과라고 한다. 성공한 사람들에 관해서도 사회적으로 합의된 전형성이 존재한다. 직접 한번 실험해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뻔한 질문과 의외의 답

다음과 같은 외국 정치가에 대한 설명이 각각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 추측해 보자.

 

() 부패한 정치인과 결탁한 적이 있으며 점성술로 결정을 내리고, 두명의 부인이 있으며 매일 줄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9~10병의 마티니를 마신다.

()회사에서 두 번 쫓겨난 적이 있으며 정오까지 잠을 자고, 대학 때 마약을 복용했고, 매일 한 번씩 위스키 4분의 1병을 마신다.

()전쟁영웅으로 채식만 하고 담배도 안 피고 필요할 때만 맥주를 조금 마실 뿐이다. 불륜은 한 적도 없고 죽을때까지 단 한 명의 애인만 사귀었다.

 

조금 받아들이기 껄끄럽겠지만 () 루즈벨트, () 처칠, () 히틀러다. 모두 사실이다. 루즈벨트나 처칠의 음주 습관이나 상식에 어긋나는 생활 태도는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다. 반면 히틀러 개인의 생활 습관은 거의 청교도에 가까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루즈벨트와 처칠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반면 왠지 훌륭한 사람일 같았던 () 주인공이 히틀러라고 때는 밥을 먹다가 씹은 느낌이다. 위대한 정치가에 대한 사회적 전형성에 그야말로 느닷없이히틀러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훌륭한 정치가는 , 담배, 마약에 가까워서는 된다. 성실과 근면은 기본이며 여자 문제 또한 알려진 없어야 한다. 알려졌어도 가능한 쉬쉬해야 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훌륭함의 전형성에 어긋나면 많은 사람들이 상처 받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성공 내러티브

마찬가지다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전형적인 서술 방식이 있다. 마치 대학 입학시험에서 수석한 학생이 과외는 한 적이 없고 잠은 충분히 잤으며 학교 공부에 충실했다고 하는 것처럼. 한국사회에서의 성공내러티브 또한 지극히 단순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한동안 TV 성공시대에 매주 소개되었던 주인공들이 대표적이다.

우선, 사람들은 젊은 시절 엄청나게 고생한다. 대개는 부모가 일찍 죽거나 찢어지게 가난하여 혈혈단신으로 무작정 상경한다. 처음에는 의욕만 가지고 무모하게 달려들다가 번의 처절한 실패를 맛본다.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하거나 돈을 떼먹고 도망간다. 좌절한 주인공은 자살을 생각하며 한강다리 주변을 기웃거린다. 그러다 죽을 용기로 번만 노력해보자는 생각으로 다시 시도한다.

이제 남은 것은 몸뚱이뿐이다. 그저 잠잘 자고 근면과 성실로 일관한다. 어찌된 일인지 이번에는 일이 풀려나가 걷잡을 없을 정도가 된다. 결국일취월장 승승장구 동분서주하여 그 분야의 최고가 된다. 드라마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이 어눌한 말투로 힘주어 말하는 성고으이 비결 또한 항상 비슷하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성공한다. 가끔 한마디를 붙이는 사람이 있다. 그동안 참아준 아내와 가족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출처 : https://www.amazon.com/%EC%95%84%EB%8A%91%ED%95%9C-%EB%A7%88%EC%9D%8C%EC%9D%98-%EC%8B%9C%EA%B0%84%EC%9D%84-%EA%B3%A0%EC%9A%94%ED%95%9C-%EB%89%B4%EC%97%90%EC%9D%B4%EC%A7%80/dp/B07PFDBJQN

여유 행복 부재하는 한국형 성공 내러티브

이러한 한국사회의 전형적인 성공 내러티브에서 벗어나 있는 재벌2세는 절대 성공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부동산 투자로 부자가 사람들 또한 성공한 사람의 부류에 포함되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은 역경을 딛고 일어서야 하며 근면과 성실로 오직 일에만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유 한가함과 같은 단어는 성공 내러티브에 절대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겐 일이 인생의 전부이며 한가하게 가족을 돌아볼 여유느 sdjqt. 그들 대부분은 언제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성공의 길은 하루하루 전쟁이기 때문이다.

입지전적인 그들의 자수성가를 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모두들 이러한 성공 시대형 성공 내러티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이다. 성공한 사람은 한결같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하고,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자지 않고, 재미라고는 전혀 없는 성직자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가? 아내와 아이들은 아빠의 성공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 한국형 성공 내러티브d[서는 우연히 얻어진 성공도 우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실패와 역경을 견뎌냈기에 얻어진 결과로 이야기해야만 하는 걸까?

 

아침형 인간은 대부분 물만 먹고 가지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면 성공 시대의 주인공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포기하거나 나태한 사람들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공 시대형 성공의 대부분은 아주 우연적이다. 아주 적당한 시기에 더욱 적당한 기회와 우연히 주어졌을 뿐이다. 하루4시간밖에 자는 아침형 인간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산 약수터에 새벽에 모이는 사람들이 모두 성공했어야 한다.

요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그저 새벽에 일찍 일어난 토끼처럼 물만 먹고가지요.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불굴의 투지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대부분은 성공시대형 성공에는 얼씬도 못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게을러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가슴에 박는다면 정말 두 번 죽이는 잔인한 짓이다. 그들에겐 그 우연한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기회는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5년전 경제신문을 들춰보라, 성공은 우연이다.

한국형성공 내러티브는 모든 사람들을 성공 중독으로 몰아간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 모두 성공할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서점의 경제, 경영, 처세와 관련된 모든 책들은 성공하는 방법에 대한 자기만의 노하우를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자서전도 크게 다를 없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성공한 사람도 모두에게 익순한 성공 내러티브의 정형화된 모범답안을 흉내 낼 따름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방법을 아무리 똑같이 흉내 내다고 해도 성공할 확률은 항상 우연의 확률을 넘어서지 못한다. 대부분의 성공이 우연이라는 사실은 불과 5 경제신문을 들춰보는 것으로도 아주 간단히 확인할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형 성공 내러티브가 추구하는 성공의 내용에 대한 검토이다. 아내를 희생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할 일을 하면서 얻어지는 성공이 과연 진정한 성공일까? 평생 번도 쉬어보지 못하고 성공을 얻었다면, 과연 성공 이후에는 있을까? 성공한 이후에도 제대로 없어 여전히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성공인가? 즐겁지 않은 성공이 무슨 성공인가? 얼마전 우리를 멍하게 했던 성공한 사람들의 자살사건들은 진짜 성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적개심에는 아군과 적군밖에 없다.

적개심이 위험한 이유는 세상을 적과 아군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방식에 있다.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 되는 사회는 매우 위험한 사회다. 회색 지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의 갈등은 항상 극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 내편도 다른 편도 아닌 사람들은 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적이 되어버린다.

한국사회가 갈수록 위험해지는 RK닭도 이러한 가르기와 다른 편에 대한 적개심이 판치는 사회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가 군대 경험 때문이라고 이야기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박힌 군사 문화,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 정한 사회의 운영원리가 흑백 논리에 EKfms 적개심을 확산시키는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업 또한 이러한 흑백 논리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군대를 경험한 남자들이 대부분인 기업의 운영 원리는 군대 조직을 닮아 가게 마련이다. 아무리 합리적 의사소통을 강조해도 까라면 까야하는 상명하복의 원리는 여전히 가장 잘 기능하고 상사들이 가장 쉽게 선택하는 조직 운영 방식이 된다. 이러한 조직의 부작용은 군대식 정서, 덜대적 복종과 적개심이라는 가지 정서로 요약된다. 그러나 군대식 운영 원리는 21세기 창의적 조직이 피해야 가장 요소다.

아군과 적군이 이분법이 명확해야만 운영되는 군대의 컨텍스트와 끊임없이 적과 동지기 변하는 21세기 기업의 컨텍스트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군인은 적에 대한 적개심에 가득 찰수록 훌륭한 군인이 된다. 그러나 기업은 다르다. 목표가 같다면 어제의 적이 언제든지 오늘의 아군이 있는 곳이 21세기 기업이다.

명령이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고지를 기어올라야 하는 군대와 사고의 유연성과 창의성으로 무장해야 하는 21세기 기업은 본질에서부터 엄청난 차이가 있다. 결국 직원들의 정신력 강화를 위해 해병대 입소를 추진하고 군대 휴양소와 별 다름없는 기업 연수원을 운영하는 기업은 21세기적 조직 운영방식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이갸기다.

 

출처:https://click4tea.tistory.com/444

 

에스키모의 막대기

에스키모는 자기 내부의 슬품, 걱정, 분노가 미려올 때면 무작정 걷는 다고 한다. 슬픔이 가라앉고 걱정과 분노가 풀릴 때까지 하염없이 걷다가,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면 그때 되돌아선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서는 바로 지점에 막대기를 꽂아둔다.

살다가 또 화가 나 어쩔 줄 모르고 걷기 시작했을 때, 이전에 꽂아 막대기를 발견한다면 요즘 살기가 어려워졌다는 뜻이고, 막대기를 없다면 그래도 견딜 만하다는 이된다. 휴식은 삶의 막대기를 꽂는 일이다. 안의 나와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평화로움이 찾아올 때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막대기를 꽂고 돌아오는 일이다.

 

자기와 대화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지난 세기까지 리더십의 핵심은 카리스마였다. 카리스마란 타인이 복종할 있는 마음이 생기도록 솔선수범하여 앞장서는 덕목을 의미한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에서는 리더가 구태여 타인의 마음에 관심을 갖고 배려하며 일일이 챙겨야 이유는 없다. 리더를 따르고 따르고의 문제는 리더의 행동이 얼마나 타인의 귀감이 되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불굴의 투지, 비전을 향한 집요한 추진력, 타인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느 돌파력 등이 21세기형 리더의 핵심적 특징으로 열거되곤 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불굴의 투지와 돌파력은 리더의 핵심 덕목이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부족해도 많이 부족하다. 사람들의 의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불굴의 투지만 보고 더 이상 감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에게 감동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다.

 

리더가 될수록 내안의 나를 만나야 한다.

남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우선내안의 나와 대화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마음을 돌아볼 모르면서 어찌 남의 마음을 잡을 있겠는가.

리더가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실수는 타인의 생각이 나와 얼마나 공유되고 있는가를 확인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만을 관철하려는 것이다. 남의 마음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이런 방식의 독선적 리더십은 지난세기의 전실일 뿐이다. 상호주관성의 리더십은 남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남의 마음을 이끌어내고 자발적인 호응을 얻어낼 있는 리더십의 기초는 마음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내안의 나와 화해하는 능력과 타인과 대화하는 능력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1년에 한 번쯤은 조용한 곳, 아주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래야 내가 보인다. 일상과는 아주 다른 경험을 통해 이 경험의 주인이 누군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낮선 곳에서의 나는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나와 전혀 다를 수 있다. 가끔은 외로운 곳에서 나를 만나야 한다. 이 만남을 두려워하다간 정말 처절한 상태에서 나를 만나게 된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 아름다운 시대는 지났다. 그런 사람은 남과 전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자페증 환자 시대에 사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시대가 바뀐 것을 모른다. 아직도 자신이 승승장구하던 시절인 착각하며 자신의 가치를 강요한다. 이런 사람이 위험한 것은 자신의 자페증을 남에게 전염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증세의 유일한 처방은 여유를 갖는 법을 배우는 것뿐이다. 이렇게 노천카페에 앉아 스스로 찬란한 풍광의 배경이 되는 방법부터 배워야한다. 스스로 배경이 되고 관객이 되어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경험을 해야 전체를 바라볼 있는 능력이 생긴다. 리더는 전경과 배경을 통합한 전체를 바로볼 있어야 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가짜!!!

인내는 잘못된 것이다.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되면 모두들 새해의 목표를 세운다. 담배를 끊겠다.부터 시작해서 영어 회화에 본격 투자하겠다까지 목표는 다양하지만 목표를 세우는 양상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지난해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해에 대한 다짐이다 하지만 새로운 해에도 모두들 환경의 고난을 자처하고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 인내와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전재로 하는 극기로 일관한다.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겠다고 목표를 세우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니 모두들 작심삼일이 밖에 없다. 인내와 극기의 내용은 해를 거듭할 수록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지만 인내극기의 결과로 찾아오는 행복은 갈수록 추상적이다. 잘못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기쁨의 날이 찾아오지 않는다.

기쁨의 날에 어떻게 행복할지 예상을 못하는데 어떻게 이 우울한 날들을 견딜 수 있일까. 행복할 생각부터 명확히 해야 인내할 있고 목표를 이룰 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인내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그저 참고 견디다 보면 행복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행복할 생각을 명확히 해야 참고 견딜 있다.

 

사소한 일상이 삶의 의미를 규정한다.

직장에서의 성공, 결혼의 기쁨과 같은 인생의 중요한 사안들은 아주 가끔 기억날 정작 지속되는 일상의 의미에는 그리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반면 친구 만나기 사교 휴식을 즐기는 것이 가장 기대되고 즐거운 일이라고 대답한 이유는 단순히 느낌이 좋기 때문이다.

평생 삶에 속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평생 에 속고만 살다 가양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일상의 느낌이 결정하는 의미부여, 틀 만들기의 과정에 너무 소흘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남편, 예쁜 아내, 사랑스런 자녀들을 곁에 두고서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일상에서 자신이 느끼는 사소한 감정에 너무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내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성공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상의아주 가벼운 느낌들이다. 카너먼 교수는 각국의 GNP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의 척도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소한 감정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수치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좋은 느낌을 가질 있는 일에 시간을 보다 많이 투자하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못한다.

 

출처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7272441&memberNo=9512750

 

삶은 참는 것이 아니다.

성공이라는 거창한 구호에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한다. 우울한 날을 참고 견딘다고 행복한 날이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저 우울한 날이 계속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해서 은퇴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의 앤더슨 교수는 25년간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일수록 은퇴한 이후, 우울증에 걸려 심장 계통의 질환으로 죽을 확률이 7배가 높다고 주장한다.

생활이 속이는 것을 그저 참을 줄만 알았지, 행복하게 사는 법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하기 때문이다.

 

행복해야 성공한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언제 정말 즐겁고 재미있고 행복한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금 삶이 자신을 속이는 것을 알면서도 참고 인내해서 나중에 많은 돈을 벌면 행복해지고 재미있게 있으리란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일을 통해 우리는 자기실현의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외의 영역 사이ㅢ 균형이 깨진 삶이 가져다주는 허무감과 허탈감 때문에 40, 50 이후의 삶이 흐트러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요즘의 젊은 세대들은 다르다. 이상 직장 때문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직장이 중요한가, 가족이 중요한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의 40대는 거의 절반이 일이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20대에서는 72퍼센트가 가정이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직장이 가족보다 중요하다고 대답한 사람은 28퍼센트에 불과했다. 젊은 사람들은 고속 승진의 기회가 주어져도 거부하겠다고 대답한 사람이 30퍼센트에 달한다. 일터에서의 승진을 위해 삶을 희생하고 싶지 않다는 경향을 보여준다. 또한 평생직장에 대한 환상은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보다 나은 조건ㅇ르 제시하는 회사로 언제든지 떠난다라고 생각한다. 20대 직장인의 70퍼센트가 한 달에 한 번 RHf로 이직을 고려한다고 한다. 아울러 그들은 현재보다 보수는 낮지만 개인적인 시간을 보다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직장으로 옮기겠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능력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에게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밸런스 경영(Worl-Life Balance) 세가치 차원

밸런스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균형은 세 차원에서 이뤄진다. 우선 일과 가족의 균형이다. 직장 때문에 가족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반복될때, 직원은 이상 일에 충실할 없다. 급작스런 상사의 호출로 주말가족의 한가로운 행복이 깨질 , 직원은 이상 가족의 심리적 지원을 기대할 없다. 그저 마지못해 일할 뿐이다.

밸런스 경영의 두 번째 차원은 회사의 성장과 내 성장 간의 균형이다. 회사의 발전을 위해 성장이 도외시되어서는 곤란하다. 회사의 성장을 통해 성장을 확인할 있어야 한다.

회사의 성장 과정에서 자기 개발의 기회가 끊임없이 제공되어야 한다. 회사의 성공이 이력서의 화려한 경력으로 남아야 한다. 이러한 확인 과정이 빠지면 어느 갑자기 일하는 것이 재미 없어진다.

밸런스 경영의 세 번째 차원은 일과 여가와의 균형이다. 일과 여가는 이상 이분법으로 구분되는 모순적인 관계가 아니다. 여가를 통해 심리적 재생산 과정이 끊임없이 이뤄져야 일터에서의 창의적 노동이 가능한 것이다. 폭탄주나 무조건 떠나고 보는 잘못된 여가 행태로 인해 월요병만 심해지는 방식으로 회사가 발전하고 개인이 만족스런 삶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다. 회사가 직원들의 여가와 건강을 배려해야 하는 시대가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회사가 정말로 개인의 삶을 배려한다는 심리적 계약이 이뤄져야 개인은 회사의 발전과 자신의 성장을 동일시할 있게 된다.

 

밸런스가 깨진 직원들의 실태!

각 개인의 균형된 삶을 배려하는 기업의 밸런스 경영은 스트레스, 직무 만족, 업무 몰입, 삶의 만족도와 같은 심리적 차원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나는 지난 2004 하반기에 기업체를 대상으로 일과 삶의 조화에 관한 연구를 실시했다. 결과 개인의 영역에서의 갈등 수준은 위의 심리적 요인에 아주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과 삶의 차원, 일과 가족의 균형 고나계, 일과 여가의 균형 관계, 회사 성장과 개인 성장의 균형 관계가 깨져 있는 직원들의 스트레스와 탈진은 매우 높게 나타났다. 반면, 직무 만족, 업무 몰입, 삶의 만족은 일과 삶의 조화가 이뤄져 있는 직원들에 비해 형편없이 낮았다.

개인은 스스로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려는 동기를 극대화하고 직무에 자발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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